[문화탐방] 신라 시조왕 오릉(사릉)과 마지막 경순왕릉
왕조의 상징적 시조왕릉은 크고 화려하고 마지막 왕릉은 초라한 모습으로 보여진다
[국방신문=주복식 문화전문기자] 역사유적 속에 고분이나 왕릉들 중에 기록으로 전하는 것도 있지만, 기록이 없는 유적들이 있다. 기록이 없을 때에는 고분 속 시설과 부장품으로 가늠을 할 수 있다.
왕조의 왕릉문화재(王陵文化財)는 그 조성시기의 시대적 배경을 두고 보면 이해가 더 빠를 수 있다. 왜냐하면 왕릉을 볼 때 정자각이나 봉분(封墳), 석물(石物)들은 시대의 사상과 경제력 왕의 권한 등을 모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신라(新羅)는 박혁거세(朴赫居世)와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敬順王陵)을 비교 해 보면 신라의 역사를 볼 수 있다. 시작과 끝을 보면 전체를 이해하기 쉽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남북한 대치상황에서 서로 경쟁하면서 살았는데 그 한 부분이 왕릉의 보존이다. 대한민국은 세종대왕(世宗大王)과 성웅 이순신 장군, 칠백의 총, 신라 박혁거세 왕릉을 성역화(聖域化)한 반면, 북한은 왕조, 시조 능들을 성역화하였는데, 고조선(古朝鮮)의 단군능(檀君陵), 고구려(高句麗)의 동명왕릉(東明王陵), 고려(高麗)의 왕건릉(王建陵)을 성역화하여 김일성 일가의 정당성을 부각시키고자 노력했다.
문화재라는 것은 그 시대의 사회성을 반영하고 있으며, 왕릉 문화재를 보면 신라 시대에는 큰 규모로 석물들을 세워 위엄있게 하였고, 고려시대에는 보통 소박한 모습으로 꾸몄으며 왕건릉과 공민왕릉(恭愍王陵)은 화려하게 조성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공민왕의 현·정능을 본받아 조성하였으며 변형되거나 축소 확대되는 것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여건에 따라 변형되기도 하였다. 국가가 발전하면 문화향상을 위하여 환경적 문화재와 휴식공간으로 삶의 질을 높이도록 보호하고 향유해야 한다.
박혁거세왕릉(오릉五陵,사릉蛇陵)
신라왕조 시조인 박혁거세 왕릉은 경북 경주시 탑정동에 위치한 오릉으로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4대 파사왕, 시조인 박혁거세 왕비인 알영閼英등 다섯 분의 능을 말한다.
사적172호로 지정된 곳으로 신라 중심지였던 반월성(半月城)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능은 단순 평지 고분으로 아무런 장식 없이 흙을 쌓은 원형봉토분으로 왕의 권위와 위용을 높이기 위하여 크게 하였으며, 남서쪽 가장 높은 능은 시조왕릉(始祖王陵)으로 높이가 약 10m이다. 두 번째는 약 9m이고 점차 작아지다가 작은 것은 1.8m인 것도 있다.
능 전면에는 최근 설치한 상석과 장명등 1기, 조선 영조 35년(1759년)에 세운 신도비와 상석(혼유석)이 있다. 능역 주위를 아름다운 소나무와 논과 밭이 보호하여 주기도 한다.
능역 남동쪽에는 혁거세 시조를 제향하는 숭덕전(崇德殿)이 있으며, 조선 세조 11년(1429년)에 건립되어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소실된 것을 선조 30년(1600년)에 재건되었으며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숭덕전 주위에는 대나무가 울창하고, 능 남서쪽에는 자연석을 이용한 연지가 있고, 숭덕전 경내에는 왕비 탄생지라 알려진 알영정(閼英丼)이라는 연못이 있다.
박혁거세의 왕릉 설화는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에 왕위를 버리고 하늘로 올라가 7일 만에 유해(시체)가 흩어져 떨어졌으며, 같은 시기에 왕비인 알영부인이 죽자 합장해서 같이 장례 지내고자 하였으나, 큰 뱀이 나타나 방해하므로 하늘의 뜻이라 여겨 머리와 사지를 따로따로 장사 지냈으므로 오(五)능을 만들고, 이름을 사릉(蛇陵)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한다.
신라시대의 왕릉들은 천년을 지탱했던 왕조답게 처음에는 반월성 왕궁의 중심지 부근 2km(오리)에 능이 정해지다가 점차 넓게 분포되어 있다.
마지막 신라 경순왕릉(新羅 敬順王陵)
경순왕릉은 신라 시대의 왕 중에서 유일하게 경기도 연천에 위치한 왕릉으로 고려(高麗)에 나라를 양위한 신라 마지막 왕이다. 경순왕은 후백제(後百濟) 왕이었던 견훤에게 경주 포석정(鮑石亭)에서 사로잡힌 신라 제55대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신라 마지막 왕으로 옹립된 사람이다.
경순왕은 신라 56대 임금으로 제46대 문성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신흥대왕으로 추봉된 이찬 효종이며, 이름은 김부(金傅)이다. 왕 재위기간은 927년부터 고려 왕건에게 바친 935년으로 9년간 통치하였으나, 정국이 불안하고 외부침입의 위협 속에서 신라 국민을 위하여 포악하지 않은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바쳤다. 장남인 마의태자(麻衣太子)는 반대의견을 제시하고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경순왕과 왕건의 공주와의 8명의 아들들은 모두 경주김씨의 파를 이루었고 후손들이 많다. 경순왕릉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에서 멀지 않은 휴전선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주위에는 고려왕릉들이 있으나 휴전선(休戰線)에 가로막혀 가 볼 수는 없다. 주소로는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번지이며, 사적 244호로 면적은 약 천이백 평3967㎡으로 현재에는 자유롭게 관람은 가능하나 남방한계선 부근으로 관람시간을 제한하고 있다. 휴전선과 군부대가 너무 가까워 아직은 통제하고 있다.
경주에 있는 왕릉에는 못 미치지만 임진강이 흐르는 모습을 바라보며 천년을 유지하고 있는 명당으로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 지관들이 부르는 봉분이 있다. 시설물로는 맞배지붕의 수복방이 있고, 비를 보호하기 위한 1986년에 지은 오래되지 않은 비각이 있다. 비문은 풍화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고, 국가에서 사적 제244호로 지정했다는 표석만이 선명한 글씨를 보여 주고 있다. 상단지역에 ‘ㄷ자’곡담을 설치하고 봉분은 사대석을 둘렀으며, “신라경순왕지능(新羅敬順王陵之陵)”이라는 표석과 조그마한 상석이 있고, 중단에는 단순하게 사각 장명등을 설치하였으며 망주석 한 쌍, 석양 한 쌍이 있다. 하단에는 단순하게 아무것도 설치하지 않았다.
야트막한 산 아래에 모셔진 신라 마지막왕은 무심하게 흐르는 임진강을 바라보면서 천년의 풍상(風霜)을 조용하게 감내하면서, 왕릉을 찾아 답사하는 후손들에게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릉,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릉, 조선 시대의 마지막 왕 고종․ 순종릉을 비교하면 나라를 바친 왕과 나라를 빼앗긴 왕과는 엄청난 차이의 역사 인식이 있음을 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치욕이라도 국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전쟁피해 없이 신라국을 그대로 고려국에 양위함으로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참상은 겪지 않고서 나라의 종말을 고한 것을 후손들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고구려, 백제, 고려, 조선왕조가 망할 때와는 분명 다른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신라는 박,석,김 세 성씨가 왕조를 이룬 고대국가이다. 마지막 후손들은 통일후 김씨들이 왕위를 이어갔고 마무리를 하였다. 왕릉의 현장에서 현재와 과거를 비교하는 역사공부를 해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