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고위직 활용 저조…아파트 경비원 근무도
한국 망명 전 북한 외교관, 1년 넘게 직업 구하지 못해 김정은체제 반감 탈북민 맞춤형 지원책 마련 시급 지적
[국방신문=한상현 전문기자] 북한의 고위급 관료들이 잇따라 망명해 한국에 정착 중인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우리 정부가 고위직 탈북민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에서 엘리트였던 고위직 탈북민들이 한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기반을 마련해 줌으로써 북한 정권을 떠받치는 중추 계층에 변화를 일으켜 추세적인 이탈을 유도해야 하는 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26일 정보당국과 탈북민 단체에 따르면 함경북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다 탈북해 지난해부터 한국에 정착한 것으로 전해진 한 북한 고위직 탈북민은 관련 경력을 살리지 못하고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북한에서 지방 인민위원회는 한국의 지방자치단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은 우리의 도 부지사에 해당한다.
함경북도 인민위원회 특성상 북한의 대외무역 등에 대한 상당한 내용을 파악하고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함경북도는 지리적으로 중국과 러시아를 접하고 있고, 풍계리 핵실험장도 함경북도에 위치해 있다.
이에 대해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중국·러시아와 무역이나 풍계리 핵실험장 활동에 대해 직접적인 업무를 하진 않지만, 해당 지역을 관할하는 도 부위원장으로서 적지 않은 내부 정보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19년 7월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망명해 정착한 조성길 전 이탈리아 주재 북한대사대리는 지난 1년 반 동안 별다른 경제활동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 있는 가족의 신변을 우려해 신분을 노출하지 않으면서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특수한 상황임을 감안하더라도 전문성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조 전 대리대사에 이어 2019년 9월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망명한 류현우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대사대리도 정착한 뒤 특별한 활동 흔적을 보이지 않고 있다.
류 전 대리대사는 2017년 9월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서창석 대사가 추방된 이후부터 대사대리를 맡아왔다.
평양외국어대학 아랍어과를 졸업한 류 전 대사대리는 북한 외무성에서 근무한 엘리트로 북한의 주요 무기 수출국인 시리아 등 중동지역에서 주로 활동한 것으로 전해졌다.
류 전 대사대리 부인도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엘리트 출신이다. 북한에서 여성으로는 흔치 않은 경제학 석사 학위 보유자다.
류 전 대사대리는 북한 최고지도자 일가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노동당 39호실의 책임자 전일춘의 사위로도 알려졌다.
류 전 대사대리의 장인인 전일춘이 수장으로 있었던 노동당 39호실은 북한 김정은 일가의 통치자금 관리처로 지목되는 기구다. 1970년대 중반 조직돼 북한의 외화벌이를 총괄했다. 여기서 마련한 비자금은 김정은의 권력 기반을 다지는 데 주로 쓰인다.
조 전 대사대리와 류 전 대사대리 같은 고위급 외교관의 활용도가 떨어지는 것 뿐 아니라 이보다 외교관 직급이 낮은 탈북민들을 고용해왔던 국가안보전략연구원도 현 정부 들어 단 한 명도 채용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 중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직업을 갖고 있지 못한 것으로 조사됐다.
통일부에 따르면 지난해 3월 기준 우리나라에 입국해 있는 탈북민은 3만3658명이다. 2009년 한 해 동안에는 가장 많은 2914명이 국내에 들어왔으며 이후 점진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코로나19로 북한과 중국의 국경이 봉쇄된 지난해에는 135명에 그쳤다.
태영호 의원은 “평화 통일을 이룩하려면 북한 정권을 떠받치는 중추 계급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면서 “고위직을 거친 탈북민들이 한국에서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면 탈북을 염두에 두고 있는 북한 엘리트들도 망설이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탈북자단체 관계자는 “북한에서 엘리트였던 탈북민은 한국에는 자산이 될 수 있는데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며 “북한에 있는 인민에게 남한에 가 봐야 소용없다는 좋지 않은 메시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북한 전문가는 “탈북을 준비하고 있는 북한 사람들이 많은 데 이들을 위한 국내 일자리 상황이 열악한 점이 탈북민 감소 추세의 한 원인”이라며 “고위직 출신을 활용하는 것 못지않게 일반 탈북자들을 위한 맞춤형 정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한편, 조성길 전 북한대사대리와 류현우 전 북한대사대리 등 북한 고위급 외교관들에 이어 북한의 고위 지방 관료도 최근 망명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김정은 체제에 대한 불안감이 북한 고위직 사이에 널리 퍼진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특히 대북제재 장기화와 코로나19에 따른 국경 봉쇄 조치로 경제난이 심화되면서 북한 엘리트층이 느끼는 압박이 상당히 커진 것 같다는 분석도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