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6.25 전쟁 74주년에 기억해야 할 일
/ 변요한 경찰청교회 목사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전도서 12:1)
여러분의 인생은 어떠하십니까? 많은 이들이 인생은 거친 광야와 같다며 힘들어합니다.
끊임없이 신발 속으로 스며드는 모래처럼, 불편하고 묵직한 삶의 무게에 입술은 바짝바짝 타고, 어디를 가도 참 만족을 찾지 못해 입만 열면 쏟아져 나오는 것이 불평이요 불만이라 감사를 잊은 지 오래된 것 같습니다.
6.25전쟁일을 맞아 1950년을 생각하면 과연 우리가 이러한 불만과 불평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74년 전 오늘 우리는 주일 아침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새벽 4시에 북한군의 선제 타격작전 계획에 따라 38도 선을 넘어온 그들에 의해 저녁 예배는 간단히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소비에트연방(소련, 현 러시아)이 세계 적화를 위해 공산국가를 늘이려고 했습니다. 소련은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해방된 한반도를 반으로 나눠 북한에서 신탁통치를 했습니다. 이후 소련은 1947년에 북한에서 군대를 철수했습니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은 1949년 3월 소련에 가서 스탈린을 만나 남침계획을 상의했습니다. 이에 스탈린은 북한에 소총 1만5000정, 각종 포 139문, T34 탱크 87대, 항공기 95대의 무기 지원을 약속했지만, 아직은 전쟁을 일으킬 때가 아니라며 만류하고 중국과 상의하라고 했습니다. 이에 중국 마오쩌둥은 중국 인민해방군 내 조선인 2개 사단을 넘겨주기로 했습니다.
북한과 소련, 중국의 남침에 대한 첩보는 미국에도 닿았지만, 미국은 당시 세계대전이 끝났으니 더이상 해외 전쟁에 휘말리지 않고 싶다는 입장이 컸습니다.
미국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그해 9월부터 미군 감축을 시작하였습니다. 미군의 철수가 시작되자 공산주의자들은 동조 세력을 규합하여 남한 내부 전역에 빨치산 무장봉기 등을 일으켰고, 이에 미군 철수가 잠시 철수가 보류되었다가 1949년 6월 30일 완전히 한반도에서 철수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1950년 1월 미국은 ‘알류샨 열도’(Aleutian Islands)에서부터 일본과 필리핀을 연결하는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으로 옛 소련에 대한 방어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는 김일성이 동족 간의 엄청난 비극인 6.25 전쟁을 일으키는 ‘오판’에 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그해 6월 25일에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희생된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 숫자는 남한이 230만, 북한이 292만, UN군 15만, 중공군 90만 총 66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또 전쟁미망인 33만명, 전쟁고아 10만명, 이산가족이 약 1000만명에 달했으며, 국가 산업의 80%가 파괴되고 건물이 초토화되어 1953년 국민 총소득(GNI)이 67달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우리가 2024년 6월 5일 한국은행 발표에 의하면, 지난해 우리나라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3만6194달러가 되었고, 처음으로 일본의 3만5793달러를 제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인구 5000만 명이 넘는 국가 중에서는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 이어 여섯 번째이며 소득만 놓고 보았을 때는 주요 7개국 즉, G7 수준입니다.
우리 국민이 그만큼 풍족하게 산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한강의 기적입니다.
그러나 6.25 당시 순식간에 남한 전체가 공산화될 위험에 처했었는데,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지난달 6일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탈출한 두 가족의 증언 “극심한 식량난으로 북한의 일부 마을에서 인육 취식 사건이 발생했다”는 끔찍한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듣는 말들이 아니었을까요?
6.25를 겪은 우리와 다음 세대인 청년들이 6.25 전쟁 74주년을 맞아 기억해야 할 것과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사랑하셨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미스바 회개 운동”(사무엘상 7:5)처럼, 1950년 8월 말부터 부산 초량교회에서 부산으로 피난 내려온 기독교인들과 250명의 목사와 장로가 모여 ‘통회 자복 기도회’를 시작으로, 어린아이부터 나이가 많으신 교계 지도자들까지 ‘민족과 교회와 개인의 죄를 회개’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통곡하며 주님만 바라보고 울부짖어 기도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을 사용하셔서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파병에 대해 신속한 결정을 내리게 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트루먼 대통령을 찾아가서 ‘한국이 공산화되면 50만명에 달하는 크리스천들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며 미국이 자유와 평화의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고 호소해 트루먼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두는 대한민국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책임을 바로 해서 6.25와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이들의 희생이 헛된 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땅에 자유와 평화가 영원히 꽃 피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변요한 목사 약력>
- 경찰청교회 시무
- 극동방송 운영위원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경찰자문위원
- 서울대학교 동창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