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식칼럼] 군 관사의 추억! 그리고 군의 사기
/ 유영식 예비역 해군 준장·한국해양안보포럼 이사
윤석열 정부가 병사들의 복지에 관심을 보이는 것에 가벼운 박수를 보낸다.
2025년에 병사들의 봉급이 205만 원이라는 뉴스는 의무 복무 중인 병사와 군대 간 아들을 둔 부모에게는 반가운 소식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시작한 병사 봉급 인상 정책은 이런저런 이유로 인상 폭이 크지 않았고 신속하지도 않았다. 반면에 윤 정부는 좀 더 과감하게 진행하고 있다.
이제 군대 가도 집에서 돈을 보내주지 않아도 생활 가능하다는 인식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잘하고 있다.
그런데 병사와 초임 부사관의 임금이 역전(?)됐다는 말들이 들린다. 물론 병장과 임관 1년차 부사관의 봉급 차이를 두고 하는 주장이고, 수당을 등을 포함하면 의무복무 기간의 초임이라도 부사관의 임금이 높다.
이런 논의를 지켜보면서 직업으로서 ‘군인’에 대한 사기와 복지를 군 생활 33년 동안 체험했던 과정을 통해 짚어본다.
우선 직업군인은 육해공 막론하고 수시 근무지 변경에 따른 잦은 이사, 열악한 주거여건, 쉴 새 없는 당직 근무, 군사대비태세 유지 등 과도할 정도의 제약와 부자유를 담보로 한 직업이기에 늘 고난스럽고 지속하기 힘든 직업으로서 인식되어 있다.
특히 약 50만 군인 중 한 명이라도 휴가 중 사건 사고에 휘말리면 마치 군대 전체의 기강이 흐트러졌다는 비난의 눈총을 받고 가슴 졸였던 필자는 더욱 직업의 특수성을 느끼며 살았다.
묵묵히 일하는 별정 공무원, 오로지 국가안보의 최후 집단,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극히 강조해온 그런 직업문화 속에서 직업적 군인의 고충을 드러내고 말하기 어려웠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기에 더욱 그랬다.
결혼한 직업군인에게 위 3가지의 개선 불가한 특수여건은 매우 심각한 후유증을 가져온다.
첫 번째가 자녀의 교육이다. 필자는 19번의 이사를 경험하고 전역했다. 적은 편에 속한다. 결혼 후 아이가 중학교 1학년이 되면서 아예 두 집 살림으로 살았다. 아이가 초등학교 6년 동안 4번을 전학하면서 얻은 결론은 이러다가 ‘애를 바보 만들겠다’라는 생각으로 귀결됐다. 대체로 직업군인은 이렇게 이동식 삶의 방식에 정착하고 적응한다. 그러니 ‘길 위에 봉급을 다 뿌리고 다닌다’라는 얘기가 만연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25년을 군에서 보내며 살다 보면 대체로 전역이 발밑에 와 있다. 1년 한 번씩 이사하고 훈련에, 당직에, 위수지역에 묶인 변방적 삶의 형태는 한국 부동산의 변화도, 증권시장의 흐름도, 평균적 수준의 재산 형성도 모두 뒷전인 삶을 살아간다.
중령 계급 정도에서 합동참모본부나 국방부, 국방부 직할 부대 근무 시 서울에 있는 군 관사 거주 동안 말고는 지속 가능한 정착은 불가능하다. 그것도 혜택이라고 하기에는 지속성이 떨어진다.
학군 따라 주택이 정해지고 주택 따라 학교등급 정해지는 한국의 상황에서 어찌 됐든지 직업군인은 상속의 혜택을 받은 소수 말고는 모두 이동식 삶을 살고 있다.
자녀의 교육은 역시나 부모를 여건을 따라간다는 말이 증명하듯 군인 자녀의 교육성과는 아주 낮은 수준이다. 한마디로 좋은 대학 간 진학률이 매우 낮은 게 현실이다. 조사 결과가 그렇다.
과연 직업군인들이 자긍심과 삶의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여건인지 심각하게 생각해 볼 대목이다.
두 번째로 군 관사는 관리 상태의 좋고 나쁨을 떠나 초급 간부 시절에는 매력적이다. 젊은 나이에 들어가 살 집이 있어서 그렇다. 하지만 군 관사 생활이 길어지면 무주택의 가능성을 높일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군 관사는 2000년대 들어 약 15평으로 개선되기 시작했으나, 그 이전에는 참으로 답답했다. 2005년 필자의 둘째 아이는 부엌 개수대에서 목욕을 시켜야 하는 42년 된 연탄보일러를 개조한 관사에서 성장했다.
그 시기에 현재 국회의원인 유용원 기자가 보도한 군 관사 실태기사는 당시 폭발적인 관심을 불렀다. 참담한 군 관사의 비애를 공감해주는 기사여서 현역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그렇지만 개선의 길은 더디고 요원했다. 그야말로 생활이 아닌 생존의 수준에서 주거가 다수를 이루었다. 해군과 공군의 경우처럼 중소도시에 있는 부대의 집단화된 군 관사를 제외하고는, 그 시기의 육군 대대급이나 연대급 군 아파트는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대다수 전방부대의 현실이 그랬다.
사용연도, 규정상 제한된 평수 등 일명 국방시설규정에 맞춘 군 관사는 언제나 사회 변화의 뒤에서 걸어왔다. 한 해 국방예산이 55조원대에 이르는 지금도 그렇다.
그래도 직업군인은 선택의 여지 없이 주어진대로 살아야 한다. 우리의 군 간부 20만명은 그렇게 복무하며 충성하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그나마 군인공제회가 추진해오던 군인주택 보급을 지원하던 정책도 2003년경 특혜시비로 중단되었다. 그 결과로 공무원 직군 중 자가(自家) 보유율이 가장 낮은 공무원 직업이 됐다.
한국인에게 도시의 집(아파트)은 무엇인가?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이 일반화된 한국사회에서 민간의 주거 환경과 비교해 턱없이 열악한 군 관사에 머물다가 전역해 노년을 맞이하는 퇴역군인은 또 뒤처지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중령으로 전역하면 서울에서, 대령으로 전역하면 인천 정도에, 장군으로 전역하면 경기지역이나 그 외 지역에 정착한다는 말은 예비역 사회에서 씁쓸한 우스갯소리다. 인생을 허투루 살지 않았어도 ‘군인’이라는 직업군이 가져다준, 한국형 경제 생태계로부터 이격된 삶의 결과물이다.
더욱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을 첨언 하자면, 국민의 선한 인식에서 멀어짐이다. 대기 태세와 당직 근무는 군인으로서 기본임무이다. 이를 지키지 못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군복을 벗고 다른 직업을 택하여야 한다.
대신에 이런 노곤한 일상을 20~30년 해온 군인에게는 국민의 따뜻한 시선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미국 시민은 미군을 존중한다. 미군은 중동 등 해외 파병부대에서 전투하다 전사하고 부상하는 피해가 있고 위험이 있는 직업이기에 더 존중받고 있다. 공항에서, 버스에서, 열차에서 미군에게 보이는 미국인의 따스함은 정말 부럽다. 모두가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것과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는 것에 대한 국가와 국민의 합당한 인정보상이다.
대한민국도 군복을 입고 가족을 떠나 있는 젊은 군인들에게 당당한 걸음을 걸을 수 있도록 하자. 그들이 당당하고 자신감이 있어야 오늘도 국민은 걱정하지 않고 생업을 유지하고 미래 구상을 펴는 삶의 터전을 기약할 수 있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청춘 시절을 국가를 위해 헌납하는 대한민국 청년의 시간으로 대한민국은 지켜지고 있다. 군인이라는 통칭으로 일부의 일탈을 전체의 멍에로 질타하고 필요에 따라 비난의 화살을 쏟아붓는 일도 이제 좀 더 세련되게 구분되어야 한다. 그래야 청춘을 국가에 헌신하는 젊은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할 수 있다. 또 젊은 병사들과 함께하는 직업군인들의 자부심이 높아져야 그들을 믿고 맡길 수 있다. 군의 사기는 강조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신뢰의 농토에서 싹트고 결실하는 열매다.
대한민국 직업군인의 사기와 복지를 위해 국회나 정부에 옹골차게 주장하는 장관을, 또 육해공군 총장을 본 지가 한 20년이 넘은 것 같다. 군의 복지를 위해 일갈하는 군 통수권자를 본지도 한 20년 됐다.
최근 광화문 시가행진도 하고, 올해 국군의 날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는 논의를 하는 것은 좋다. 상징적 조치도 환영하지만, 청춘을 바친 군인들이 일반 사회로 돌아올 때 보다 안정적이고 존중받는 분위기가 정착된 국군의 날이면 더욱 좋겠다.
<유영식 전 해군 준장 약력>
- LIG넥스원 전략커뮤니케이션 실장
- 해군 예비역 준장
- 해군 공보과장 / 공보실장
- 제4차 남북 장성급 회담 언론담당
- 2002년 한일월드컵 안전본부 대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