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식칼럼] 1988 해군 ‘낙도봉사단’의 추억

/ 유영식 예비역 해군 준장·한국해양안보포럼 이사

2024-11-22     한상현 전문기자
유영식 예비역 해군 준장·한국해양안보포럼 이사

대한민국의 유인도서는 465개이고 무인도서는 약 3348개로 약 총 3813개의 섬이 있다. 이 섬들은 조업의 기지로, 양식장의 기지로 어민들의 삶의 터전이 돼 왔다.

대부분 섬은 서남해안에 분포되어 있다. 1980년대 대간첩작전이 주요했던 시절에는 해군은 백령도, 대청도, 어청도, 흑산도, 추자도, 거문도, 욕지도 등 제법 큰 섬을 중심으로 서남해안의 거점도서에 기지를 구축하고, 고속정 전투 전대의 기지를 운영하면서 대간첩작전 태세를 유지했다.

필자는 오래전 퇴역한 고속정 PK-171호정의 부 정장으로서 1986년 서남해를 주름잡던(?) 시절이 있었다. 25세 중위 시절이다. 그 이후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해군본부 문화홍보과에 보직되었다.

홍보담당이었지만 실제 직무는 낙도봉사활동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12개월 중 약 4개월을 상륙함(LST)에 편승해 군의관, 법무관, 홍보단원들로 하여금 약 100여개 섬을 찾아가 종합 봉사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계획 운영하는 일이다.

거주민이 적고 여객선이 자주 기항하지 않는 그야말로 15명에서 약 100명 이하 주민이 거주하는 낙도만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선무활동이다.

해군본부에서 출발하는 낙도봉사는 일정이 복잡하기도 했지만, 작전 지원 없이 단독으로 진행하는 것이어서 안전사고나 일정이 꼬이면 홀로 처리하거나 중단해야 하는 선택이었기에 단독작전일 수밖에 없었다.

인원이 60여 명에 달하는 봉사단원은 의료장비 후원 물품 등 8톤 트럭 2대분을 진해로 가져와 상륙함(LST)에 선적하고, 한번 출동에 30일간 약 20여개 섬을 방문해야 했다.

이 사업은 섬 지역의 주민을 상대로 하는 정부 홍보사업이기에 초기에는 중앙정보부에서 주관했다. 그러던 것이 함정을 보유한 해군 주도로 하는 사업으로 변모했다.

1년 중 4월부터 11월 말까지 거주민 100인 이하의 섬을 찾아가 의료, 법률, 문화공연을 하는데 이것이 보통 고된 일이 아니었다. 20대 청년 장병들의 힘이 아니었으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봉사단의 주력인 홍보단은 해군에 들어오는 연예병사로 구성되었으며 가수, 개그, 연기 등 분야별 오디션을 통해 선발되었다. 가수나 개그 분야에서 활동하는 그들은 각자 주특기가 있어도 섬마을 선생님 같은 소위 트로트 노래를 잘 해야 했고, 약품과 악기 등을 배에서 섬으로 옮길 강한 체력도 유지해야 했다.

유명 연예인 중엔 홍보단 출신이 많다. 필자가 홍보단을 운영할 때는 김용만, 김건모, 지석진 등이 활약해 주었는데, 그들은 전역 후 국내 톱스타로 등극한다.

이들 모두 체력을 길러준 1988년 당시 대위 유영식의 덕택(?)이리라 생각한다.

김용만은 필자의 당번이었다. 그는 좋은 인성을 갖고 있었고 그 당시에도 유연한 사고로 선후배 간의 연결고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훗날 그가 MBC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을 보고 김용만이 나의 당번이었다는 얘기를 자랑삼아서 하곤 했다.

그 증거는 34년 전의 빛바랜 VHS 테이프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바로 1988년 필자의 결혼식에서 김용만과 김건모가 축가를 불러주었던 영상이다. 그 모습이 담긴 영상을 방송사에 보내 추억의 웃음 소재로 제공해볼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어쨌든 해군 낙도봉사단 담당장교 1년은 매우 소중한 추억을 남겨준 임무였다. 해군 낙도봉사단은 소득수준이 낮고 인구가 적으며 부족한 항구시설과 의료사각지대에 놓인 섬을 봉사대상으로 했다. 당시는 내무부 특수지역과에서 의견을 주면 해군은 이를 바탕으로 대상도서를 선정해 준비에 들어갔다.

우리나라는 삼 면이 바다이지만 섬의 분포를 볼 때 남해와 서해가 주 무대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광양을 기준으로 남서해가 주요 대상이었다.

광양을 기준으로 한 전라남도의 섬은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섬의 숫자가 많기도 하지만 주요 거점도서 즉 추자도, 거문도, 흑산도, 소흑산도 등을 제외하고는 섬에 방파제 즉 부두가 없다는 것이다. 부두가 없으면 안정적인 조업을 할 수 없어 결과적으로 열악한 조업 환경으로 인해 매우 가난한 섬이 된다.

유난히도 전라도에 그런 섬이 많았다. 이것이 영남과 호남의 차이인가. 1988년 약 100여개 섬을 돌아다닌 당시 필자의 소회였다.

해군은 매년 봉사활동을 마치면 활동 결과보고를 제출하고 내무부 특수지역과에서는 이를 종합해 보완대책을 마련하는데, 그 핵심내용은 서남해해역 도서의 어선 정박시설 확충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민원이 전기공급과 도로 개선이었다.

그 당시는 청와대, 해군 등에서 낙도 어린이 초청 행사를 하면 주 대상이 서남해 즉 호남지역의 학생이었다. 호남의 섬은 낙후의 징표였다.

낙도 봉사활동의 영향이었을까? 서남해의 섬에 기본적인 기반시설이 갖춰지기 시작해서 1997년을 기준으로 서남해 도서 정비사업이 본격화됐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정운영 시기였다.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사람이 살 수 있게 한 아주 잘한 정부사업이다.

방문했던 섬들 가운데 다시 1988년으로 돌아가 서정적이고 풍경화 같은 섬을 우선 한 곳만 떠올려본다.

‘위도’는 대한민국 최고의 검은 돌 오석(烏石)이 나는 곳이다. 잠수부들이 건져 올린 돌을 고르고 가공해서 판매하는 전문 수석인들의 놀이터였다.

당시 필자는 위도리 이장에게서 기념으로 돌 한 개를 받았다. 이것을 가수 박성철 병장이 함정으로 옮기다 그만 깨뜨리고 말았다. 다들 박성철 병장을 두고 영창감이라며 수군수군했지만, 필자는 아무 말 없이 깨진 돌을 서울로 가져와 잘 붙여 거실에 두었다. 이후 거실에 놓인 오석을 볼 때마다 섬을 떠올릴 수 있었고 깨진 흔적은 짙은 추억이 되었다. 박 병장은 별 탈 없이 그해 12월 전역했다.

홍보단이 섬을 찾으면 섬 관할 지역의 군수가 격려차 오곤 했다. 사달의 시작은 위도였다. 소식을 듣고 위도로 온 군수는 격려품을 가져왔다고 했다. 행정선에 가보니 살아있는 돼지 한 마리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게 아닌가. 이놈을 함정으로 옮겨야 하는 홍보단원들은 아연실색했다. 버리고 갈 수도 없고 난감함에 잠시 굳어 있자니 이장이 리어카(손수레)를 꺼내주었다. 그것에 실어 함정으로 옮기라는 것이다.

필자는 얼른 PRC 무전기를 통해 함정에 연락했다. 산 돼지를 가지고 가니 준비하라고 하자, 함정에서는 절대 돼지를 배에 실을 수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섬 주민들에게 주고 오라고까지 했다. 그래도 군수가 준 성의인데 돌려줄 수는 없고, 일단 돼지를 배에 실었다가 다음 홍보 활동을 하는 섬에서 처리하는 것으로 함정과 합의를 보았다.

돼지를 실은 단정이 접근하자 함정의 장병들이 모두 구경하러 나왔다. 단정에서 갑판으로 돼지를 올릴 때는 사다리에 태울 수 없어 함정의 도르래를 이용해 끌어올려야 했다. 함장 이하 모두 이런 모습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배에서는 살아있는 목숨은 끊지 않는다는 징크스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돼지를 함수 포대에 사흘간 묶어 두었고, 홍보단원들은 야간 항해 시 ‘돼지야’라는 노래를 만들어 부르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돼지는 다음 섬에 도착해 부대원들의 전투식량이 되었다.

그 후 우리는 각 군청에 일일이 연락을 해서 낙도봉사단 격려품으로 절대로 살아있는 가축을 보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해야 했다. 다 지난날의 추억이다.

서남해에 위치한 크고 작은 섬은 대한민국에 신이 주신 선물이다. 수려하고 아름다운 이 섬들을 잘 활용하여 동해, 서해, 남해 3면이 바다인 나라답게 해양 자원과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국가 전략을 마련하는 지도자가 새삼 그립다.

<유영식 예비역 해군 준장 약력>

- 현) 한국해양안보포럼 이사
- 전) LIG넥스원 전략커뮤니케이션실장
- 전) 해군 준장
- 전) 해군 공보과장 / 공보실장 
- 전) 제4차 남북 장성급 회담 언론담당 
- 전) 2002년 한일월드컵 안전본부 대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