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주복식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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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4일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연인사이의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의 표시로 사탕을 전달해 주는 '화이트데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역사의 책장을 넘겨보면 우리 가까운곳에 꼭 기억하고 싶은 역사적인 3월 14일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423년 전(1592년)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이 있었다. 일명 '7년전쟁'이라고도 하는 참혹한 전쟁으로 역사는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대부분 처참하게 유린당한 전쟁이었지만, 이순신 장군의 해전이나 김시민 장군의 진주산성전투, 권율 장군의 행주산성전투,  신립 장군의 탄금대전투 등은 승패를 떠나 오늘날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참혹했던 전쟁일지라도 기억의 강을 넘어 버린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고 있다고 볼 때, 과거를 정확히 알고 현재에 충실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서울 인근에 위치한 임진왜란의 역사 교육현장인 행주산성에 얽힌 이야기를 알아 본다.

산성 정상의 행주대첩비
산성 정상의 행주대첩비

 행주산성의 자연 환경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은 124m의 완만한 산으로 남쪽으로는 한강이 동쪽으로는 경사가 심한 지형으로 그 끝에는 창릉천이 흐른다. 경사가 완만한 서쪽과 북쪽으로 는 개활지가 있어 남쪽에서 공격해 오는 왜군을 방어하거나 한강 북쪽을 따라 한양(서울)으로 진입하기 위한 거점으로는 삼는데는 천혜의 요충지다.

전라도 관찰사 권율 장군이 한양(서울)을 되찾기 위한 고지를 물색하다가 한양(서울)과 거리도 가깝고 한양(서울) 공격과 방어에도 유리하다고 판단해,  선정한 곳이 덕양산(행주산)이다.

행주산성 위치도  현재 자유로와 행주대교 양화대교가 보인다. 완만한 행주산성 입구쪽에서 일본군이 공격하였다. 다음지도
행주산성 위치도 현재 자유로와 행주대교 양화대교가 보인다. 완만한 행주산성 입구쪽에서 일본군이 공격하였다. 다음지도

요즘은 자유로와 제2자유로 행주대교와 방화대교 등 도로가 발달되어 있다. 덕양산 정상에서 보면 한강과 서울의 도심, 그리고 고양시와 북한산이 펼쳐져 있다.

산성과 행주대교 사이에는 유원지가 형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먹거리 장소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일부지역에는 전투를 치뤘던 토성이 유적으로 남아 있다.  

임진왜란 이야기

행주대첩 전투도  행주산성관리소
행주대첩 전투도 행주산성관리소

1592년 3월 13일 소규모 왜구 노략질에서 체계적 일본 군인으로 침입한 왜란이 일어났다. 하루 후 3월 14일 부산진전투와 15일 동래성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쉽게  한양(서울)을 점령했다. 일본군이 평양까지 점령하였다가 평양성을 빼앗기고 서울로 퇴각하였다. 고양시에 있는 벽제관 전투에서 매복으로 승리한 왜군들이 서울을 확실히 점령하고자 덕양산에 있는 조선군을 공격한 전투이다. 

한편, 권율 장군은 한양(서울) 수복을 위하여 수원 독산성에서 승리한 후, 덕양산에 주둔하여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왜군 총대장 우키타(宇喜多秀家)를 비롯해 이시다(石田三成)·마시다(增田長盛)·오타니(大谷吉繼)의 세 봉행(奉行 : 통치자 풍신수길 장군을 보좌하던 최고 무관직) 등 본진의 장수들까지 7개 부대로 나눠 3만여 병력이 행주산성으로 공격했다.

성(城) 안의 조선 관군이 갖고 있는 무기는 궁시(弓矢)·도창(刀槍) 외에, 변이중이 만든 화차(火車), 권율의 지시로 만든 수차석포(水車石砲)라는 특수한 무기가 있었다. 신기전이라는 총통기는 다연장로켓포로 40량을 준비했다. 또, 산성에서는 일본군이 몰려올 것에 대비해 성책을 내외 이중으로 만들었다.

전투현장인 토성  지금은 등산로로 활용하고 있지만 처절했던 공간이다
전투현장인 토성 지금은 등산로로 활용하고 있지만 처절했던 공간이다

토성을 쌓아 조총 탄환을 피할 수 있게 했고, 병사들에게는 적에게 뿌려 눈뜨지 못하게 하는 재를 담은 주머니를 허리에 차게 했다. 일본군이 공격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권율 장군은 이번 싸움에 병사들의 생사는 물론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것을 병사들에게 철저히 교육시키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1593년 2월 12(음력)일 오전 6시 경 일본군의 선봉 100여 기(騎)가 나타나더니 뒤이어 대군이 밀려 왔다. 7개 부대로 나누어 한번씩 공격하였다. 제1대장 고니시(小西行長)가 선봉으로 나섰다. 그는 평양성 싸움에서 대패한 이후 벽제관(碧蹄館)싸움에도 참전하지 않다가 마침내 설욕할 좋은 기회라 여겨 성(城) 공격에 앞장섰다.

성(城) 안의 아군은 일시에 화차에서 포를 발사하고, 수차석포에서 돌을 뿜어내며, 진천뢰(震天雷)·총통(銃筒) 등을 쏘아대고 강궁(强弓)의 시위를 당겼다. 몰려들었던 적의 병마가 이에 맞아 혼비백산하여 고니시의 제1대는 궤멸되어 물러갔다. 이시다가 이끈 제2대도 공격에 실패했다.

이어 제3대의 일본군들이 달려들었다. 대장 구로다(黑田長政)는 전년 9월 연안성(延安城)싸움에서 의병에게 대패한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긴 방죽 위에 누대를 만들고 그 위에 조총수(銃手) 수십 명을 배치해 성(城) 안으로 조총을 쏘게만 하고 병사들에게는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이에 조선군 지휘자 조방장 조경은 대포를 쏘아 이를 깨뜨렸다. 또 포전(砲箭) 끝에 칼날 두 개씩을 매달아 쏘니 맞는 자는 즉사했다.

제1대부터 3대까지 연패하는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총대장 우키타는 크게 노해 선두에 나서니 이에 소속된 제4대 장병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랐다. 제4대는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계속 진격해 제1성책을 넘어서 제2성책까지 접근했다.

조선 관군은 한때 동요했으나 권율 장군의 독려로 힘을 얻어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화차의 총통이 적장에게 집중 사격되어 우키타는 부상을 입고 부하의 부축을 받으며 도망쳤다. 그리고 이 때까지 남아 선두에서 지휘하던 제2대장 이시다도 부상으로 후퇴했다.

제5대장 기카와(吉川廣家)는 제4대의 뒤를 이어 화통(火筒)을 성책 일부에 집중 발사해 불이 붙게 했으나 관군은 미리 마련한 물로 꺼 버렸다. 관군이 시석(矢石)을 퍼부어 기카와가 큰 부상을 입고 퇴각했고 부하 병졸의 사망자만도 160명이나 발생했다.

두 대장의 부상에 분노한 제6대장 모리(毛利秀元)와 고바야카와(小早川秀秋)는 제2성책을 공격하였다. 이에 스님인 처영은 승의군을 이끌고 용감히 맞섰다. 그리고 승의병이 각기 허리에 찬 재를 뿌리자 눈을 뜰 수 없게 된 적군은 달아나고 말았다.

일본군은 마지막 남은 제7대로 공격을 시작하였다. 제7대장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는 노장으로 선두에 서서 서북쪽 자성(子城)을 지키던 승의군 한 귀퉁이를 뚫고 성 안에까지 돌입하려 하였다. 이에 승의병이 동요하여 위급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 때 권율 장군은 칼을 빼들고 승의군의 총공격을 호령하고 일본군과 치열한 백병전에 돌입하였다. 옆 진영의 관군도 화살이 다해 투석전을 폈는데, 이때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이 일치단결하여 싸웠다. 특히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다 주어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동족상잔의 6.25때 인천상륙작전으로 행주산성을 점령한 해병대의 기념탑과 당시 사용한 종류의 수륙양용 장갑차를 전시하고 있다. 행주산성 주차장 앞에 있다.
동족상잔의 6.25때 인천상륙작전으로 행주산성을 점령한 해병대의 기념탑과 당시 사용한 종류의 수륙양용 장갑차를 전시하고 있다. 행주산성 주차장 앞에 있다.

성(城) 안에 무기와 군인이 부족한 상황을 눈치 챈 왜군이 기세를 올리려 했다. 그러나 때마침 경기수사(京畿水使) 이빈(李蘋)이 화살 수만 개를 실은 배 두 척을 몰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적의 후방을 칠 기세를 보였다. 이에 당황한 적은 성(城) 안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성(城) 안의 관군도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적을 추격해 130여명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파괴된 내성도 급히 보수했다.

적군은 퇴각하면서 사방에 흩어진 시체를 불태웠다. 아군은 그들이 버리고 간 갑주(甲胄)·도창 등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했다. 노획물 중 중요한 것만도 272건이었다. 적군이 버리고 간 적의 시체가 200구가 넘었고, 타다 남은 시체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명(明) 장군 이여송(李如松)은 평양으로 철수하던 중 행주대첩의 소식을 듣고 벽제관에서 패하고 급히 도망간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권율 장군은 행주산성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파주산성으로 병력을 이동하여 도원수 김명원과 함께 정세를 관망하였으며, 행주대첩으로 강화협상이 진행되며 장기전으로 변하는 계기가 되었다.

 

권율장군과 충장사 그리고 기공사

행주서원지에 있는 오른쪽 건물이 기공사. 멀리 한강과 행주대교가 보인다.
행주서원지에 있는 오른쪽 건물이 기공사. 멀리 한강과 행주대교가 보인다.

기공사는 흥선대원군이 1865(고종1년)년 전국의 650여개의 서원중 사표가 될만한 서원들 중 47개만 남기는 서원 철패령에도 당당하게 살아남았다. 헌종 임금이 글씨를 내려준 사액서원(임금이 내려준 현판) 기공사(행주서원)로 사당이었다. 이 때 살아남은 서원 중에 9개가 2019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서원에는 제향자가 있어 사당개념과 지방 교육기관으로 유지 되고 있었다.

행주산성보수정화지(1970년)에 의하면 원래의 기공사는 행주나루터 주변에 있었으나 6·25때 불타 주초석만 있었고, 한강변 정리가 안 된 상태이기에 사당을 산성 중턱에 충장사를 새로 건립하였다. 행주대첩의 날인 1593년 2월 12일 음력을 양력으로 계산하여 매년 3월 14일을 제향일로 정하여 권율 장군을 기리고 있다.

행주나루 입구에 있었으나 6.25때 불타고 새롭게 산성내에 세웠다. 권율장군을 모시는 사당이 이치전투에서 승리한 금산에도 충장사가 있다.
행주나루 입구에 있었으나 6.25때 불타고 새롭게 산성내에 세웠다. 권율장군을 모시는 사당이 이치전투에서 승리한 금산에도 충장사가 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나 권율 장군이 없었다면 일제 식민지가 20세기가 아니라 16세기에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과장은 아니다. 많은 장군들이나 의병장들이 있었지만 승리한 전공(도표 참고)을 제대로 세운 전투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육지에서 처음 이긴 이치전투와 독산성 전투는 권율장군의 기지와 독려로 승리를 챙취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돌아가신 후에 쓰는 졸기에 “전 도원수 권율(權慄)이 졸하였다. 율은 임진년 변란을 당하여 몸을 던져 싸움터에 달려가 전투 때마다 견고한 성을 함락시켰었다. 그 이치(梨峙)의 승리와 행주(幸州)의 대첩(大捷)은 비록 옛날 명장(名將)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보다 더하겠는가. 국가가 중흥(中興)의 업을 이룬 것은 실로 이에 힘입은 것이니,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행주대첩비
행주대첩비

 

권율 장군이 돌아가신 1년 후에 행주대첩 때 고생했던 부하 동료들이 기념비를 세운 것이 지금 산성 정상에 있는 대첩비각 안에 있다. 마모가 심하여 알아볼 수 없지만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4호로 보호하고 있다. 두 번째 중건비는 현재 행주서원(기공사)에 있다. 정상에 우뚝 서있는 세 번째 비는 박정희 대통령이 역사의식을 심어주기 위하여 1970년에 보수정화 공사시에 세웠다. 행주대첩비 글씨는 대통령이 직접 쓰고, 비문은 신석호가 짓고 서희환이 썼다.

역사교육장이면서 휴식공간

행주산성에 들어서면 일반적인 유원지와 비슷하게 휴식터로 이용하고 있다. 심신을 달래주는 공간으로 간단한 걷기 운동도 할수 있도록 올레길도 조성되어 자연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도심의 휴식공간이다.

덕양정과 방화대교의 야경.  행주산성관리소
덕양정과 방화대교의 야경. 행주산성관리소

오래전에는 격전장이었던 성들이 요즘은 역사교육장과 휴식 공간으로 변해 있다.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인 진주성과 병자호란의 남한산성 등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이면서 역사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사적지 제56호로 지정된 고양 행주산성으로 약 십만평(347,670㎡)으로 올레길과 국궁장인 충훈정과 덕양정 기념관등이 있어 시민들이 즐기는 휴식공간이면서 역사교육장으로 애용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산성의 경사진 곳을 오르다 보면 운동도 되고 한강과 양화대교와 자유로 등을 볼 수 있어 시원한 스트레스 해소 공간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한강변의 자전거 길이나 평화누리 길들이 연결되어 건강을 이용하기 좋다. 꽃필 때와 단풍시기에 야간개방을 하면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다. 새해맞이 행사를 올해에는 코로나19로 취소했지만 매년 행사를 하고 있다. 소망을 빌기도 하고 서울 야경을 볼 수 있는 기회로 많은 시민들이 찾고 있다.

새해맞이 행사. 행주산성관리소
새해맞이 행사. 행주산성관리소

치욕의 역사나 자랑스러운 역사라도 후대에 교훈으로 활용할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이다. 상처받고 어려운 임진왜란 속에서 자존심을 지키고 승리한 고양 행주산성전투는 우리들에게 미사일 원조인 신기전이라는 신무기의 자부심과 민관군이 일치단결하여 지켜낸 공간으로 자랑스런 휴식공간으로 더 많이 활용하고 있다.

3월 14일을 '화이트데이'만으로 생각하지 말고, 권율 장군의 진두지휘로 왜군을 격퇴시킨 역사적인 '행주산성전투 승리의 날'로 오래오래 기억의 책속에 담아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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