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신문=주복식 문화전문기자] 세기의 도박을 성공시킨 인천상륙작전은 1/5000의 확률을 극복하고 대한민국을 지킨 숭고한 성공작전이다.
인천상륙작전은 서울 수복과 38선 회복 후 파죽지세로 압록강까지 진격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공격과 방어를 반복하며 고지쟁탈전 끝에 현 휴전선을 유지하게 되었다.
한반도가 공산화되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수도 서울의 수복은 바로 인천상륙작전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자유 대한민국이 오늘날 세계 10위 권의 경제대국을 이룬 그 배경에는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그 의미를 기리기 위해 맥아더 장군의 동상과 그 전적지들이 인천시 중구 제물량로 232번길 46에 위치한 자유공원에 있다.
응봉산 전체를 자유공원이라 부르는데 조성연대는 서울의 파고다공원(1897)보다 9 년 앞선 1888년으로 되어 있다.
인천항 개항 뒤 외국인 거류민단(居留民團)에서 관리 운영하여 당시 시민들은 이를 만국공원(萬國公園)이라 불렀고, 그 뒤 일본의 세력이 커지면서 1914년 각국 거류지의 철폐와 함께 공원 관리권이 인천부(仁川府)로 이관되자 그 때부터는 서공원(西公園:일본인들이 이른바 神社를 지어놓은 동공원이 따로 있었음)으로 불렀다.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응봉산 정상에 세워진 1957년 10월 3일부터이다. 지난날 이곳에는 인천각·청광각(淸光閣) 등의 건조물이 들어서 있었으나 6·25전쟁 때 없어졌다. 충혼탑을 비롯하여 석정루(石汀樓)·연오정(然吾亭) 등이 있으며, 학익고인돌[鶴翼支石墓]을 옮겨 보존하고 있다.
자유공원은 인천 시가지와 주위의 연산(連山)·항만·앞바다 등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시민의 휴식·위락장소이며, 미술대회·글짓기대회 같은 각종 행사도 자주 열린다. 인천상륙작전 71주년을 맞은 현시점에서 당시 상황을 잠시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인천상륙작전의 구상을 하게 된 큰 이유는 반격작전지도에서 보듯이 북한군의 모든 역량이 낙동강 전선에 집중되어 있어 인천에 대한 적의 방어능력은 미약하며 증원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여 세기의 도박을 성공시켜 서울 탈환과 북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월미도는 동굴요새화가 되어 사전에 제거하지 않으면 상륙작전시 피해가 크지만 사전에 포격으로 제압해버리면 기습작전의 효과가 적어 실제로 군산이나 진남포 등에 사격을 하여 기만하는 방책을 만들었다.
인천의 작전과 함께 비슷한 시간에 포항 북쪽 26KM 장사리에 양동작전을 실시하였다. 780여명으로 구성된 독립유격대 대대급으로 해군 수송선 문산호를 타고 상륙하다가 태풍영향과 안개로 좌초되어도 상륙작전을 실시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다. 현장에서의 기습작전의 실패이지만 인천의 성공을 가져왔다.
인천 상륙 작전은 세군데로 상륙하였는데 가운데는 월미도 그린비치, 북쪽은 레드비치, 남쪽은 불루비치라고 정하고 상륙작전을 성공하여 지금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전쟁당시와는 다르게 많은 발전으로 변화가 컸지만 표지석을 세워 기념하고 있다. 상륙지점 청색,적색해안 두 곳은 현재에는 내륙으로 변했다. 인천의 발전된 변화를 볼 수 있다.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에서 바라본 인천항은 월미도를 끼고 있는 제1부두의 내항을 볼 수 있도록 동상을 조성하여 자유를 지켜주고 있는 모습이다. 인천은 비류백제가 세워지던 이천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김일성이 인천 상륙작전을 예상했는가? 아니면 모르고 있었나? 는 지금에서 평가하기는 어렵다. 알았다고 해도 현전선이 대구 북방에서 부산의 경상도 일부만 남겨 놓고 최후를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제공권을 유엔군에게 빼앗긴 김일성은 최후의 발악을 하다가 상륙작전으로 전선이 두동강 나고서 민주주의 유엔군과 중공군이 참가한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전쟁으로 현재는 휴전 상태이다.
인천항이 개항의 중심으로 서양 근대문물인 기차가 1899년에 서울까지 개통되어 하루 생활권으로 만들어 국가발전의 기초를 만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