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신문=주복식 문화담당기자] 칠궁은 아들을 잘 두어 왕의 어머니가 되었지만 종묘에 갈 수 없는 후궁들의 사당이다. 처음에는 영조의 어머니인 육상궁이 지어졌다가 추가로 모아져서 일곱 분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궁호를 받은 분들이 계신 곳이다.
현재 청와대 옆에 위치하여 특별관람이 가능하다. 영조가 어머니 무수리였던 숙빈최씨를 소령묘에서 소령원으로 고치고 육상묘를 지어 경복궁 북서쪽에 짓고 제를 올린 것이 현재 칠궁의 시초이다. 냉천정이나 자연이나 송죽재나 풍월헌이나 삼락당은 영조의 정성으로 지어준 건물들이다.
후궁 사당이 만들어진 순서로
⓵경종 2년(1722)에 어머니 희빈 장씨의 사당 대빈궁을 교동에 만든 것이 시초이다.
⓶영조 21년(1743)에 추존왕 원종의 저경궁을 살던 송현방에 건립했다.
⓷영조 2년(1725년) 어머니 숙빈 최씨 사당을 현 육상궁에 건립하고 영조20(1744) 육상묘라 존칭하고 영조29(1753)에 묘에서 궁으로 격상시켰다.
⓸영조 41년(1765) 사도세자 추존 장조의 어머니 영빈 이씨 사당을 순화방에 의열묘로 세우고 정조2년(1788)에 선희궁으로 개칭했다.
⓹정조 2년(1778)에 추존 진종의 어머니 정빈 이씨 연호궁 사당을 순화방에 세우고 고종 7년(1870)년에 육상궁의 별묘로 옮겼다.
⓺순조 24년(1824) 어머니 수빈박씨의 경우궁을 계동에 건립했다.
⓻1911년에 영친왕 어머니 순헌 귀비의 사당을 덕숙궁 살던 건물에 세우고 1913년에 태평로에 옮겼다가 1929년에 육상궁으로 옮겼다.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의 4개의 사당은 1908년에 육상궁 경내로 옮겼다. 서울 시내의 팽창발전으로 기존의 불필요한 건물들을 축소 조정할 필요가 있어 한 곳으로 모아 정리됐다.
요즘 어린이나 어른들은 혼자 방을 쓰고 싶어한다. 아니 어느 누구라도 혼자 사용하기를 원하는데 여건이 덜되면 함께 쓰지만 인권 침해로 각자 사용하는 것을 선호한다.
후궁끼리는 함께 하지 않지만 며느리와 손자며느리는 함께 한다. 숙종의 후궁이 두 분이며, 영조의 후궁이 두 분이다. 육상궁(숙종 후궁 숙빈 최씨)과 연호궁(영조 후궁 정빈 이씨)이 며느리 관계로 한 건물에 있다.
선희궁(영조 후궁 영빈 이씨)과 경우궁(정조 후궁 수빈 박씨)도 손자며느리 관계로 함께 모셔져 있다. 빈은 후궁들중에 가장 높은 1품이며 영의정도 1품이다.
그래서 풍수지리가들은 청와대의 풍수가 나쁘다고 경복궁 풍수가 나쁘다고 한다. 대통령들의 말로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청와대 옆에 있는 칠궁의 혼령이 각방을 쓰고 싶어 앙탈을 부리는 것은 아닌가 한다. 각방이나 독채를 달라고 표현하는 것은 아닌지...
자식을 잘 두거나 제자를 잘 두어야 부모나 스승이 좋은 대접을 받는다. 세종대왕이 용비어천가에서 “육룡(추존왕 태조 이성계 4대조와 태조, 태종)이 나르샤”라고 찬양했고 공자, 맹자, 순자, 주자 등은 제자를 잘 두어 세상에서 대접받고 있다. 가정이나 국가, 기업, 단체들도 잘난 인재를 양성하려 한다.
육상궁의 하마비만 있고 저경궁의 하마비는 한국은행 입구에 있으나 나머지 5개의 하마비는 행방을 알 수 없다. 분명 사당이었기에 있어야 한다. 살아있는 궁궐에는 없지만 죽은 궁인 사당에는 있어야 한다. 옮기는 과정에서 모든 하마비를 옮길 수는 없고 하나만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출처가 불분명한 이화여고 후문에 있는 것은 어느 궁에 있던 것을 칠궁으로 옮긴 후에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고 옮겼을 것이라 보인다.
칠궁의 한자漢字들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알면 아는체하기 좋은 한자들이기에 경복궁천자문 책에서 사진과 글을 인용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