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신문=윤석진 기자] 올들어 무려 17차례나 미사일 도발을 감행한 북한이 지난달 30일부터 유엔 제네바 군축회의(Conference on Disarmament·CD)의 순회 의장국을 맡으면서 유엔의 이미지와 신뢰도 저하를 우려하는 국제사회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북한은 약 11년 만에 순회 의장국을 맡아 관행대로 2일(현지시간) 유엔 제네바 군축회의 첫 본회의를 주재했다고 로이터·AFP통신 등이 전했다.
한대성 주제네바 북한 대표부 대사는 이날 첫 본회의 개회 발언에서 “북한은 세계 평화와 군축에 기여하는 데 전념하고 있으며, 군축회의의 중요성을 안다”며 “이 역할을 맡게 된 것은 영광스러운 특권으로 의장국 수임을 진지하게 여기고 있으며, 회원국들과 긴밀히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새 의장국이 주재하는 첫 본회의는 통상 의장국으로서 CD의 활동 계획을 설명하고, 다른 회원국들이 축하와 덕담을 나누는 자리이나 이날 회의장은 핵·미사일 개발과 도발을 계속하는 북한을 규탄하는 성토장이 됐다.
이날 본회의장에서는 한 대사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40여 개국이 북한의 의장국 수임을 비판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는 등 각국의 우려와 유감 표명이 잇따랐다.
아만다 골리 주제네바 호주 대사는 한국과 미국, 일본, 유럽연합(EU) 회원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40여 개국의 공동 성명의 대표 낭독자로 나서 “군축회의의 가치를 계속해서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는 북한의 무모한 행동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날 성명 참가국들은 주요 군축 의제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북한이 의장국을 맡는 기간에도 관련 회의에 참석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같은 참여가 “북한의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 행위에 대한 무언의 동의 또는 인정으로 해석돼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의장국 수임 초기에 공동 입장을 강조하고자 한다”고 성명 발표 배경을 설명했다.
독일, 프랑스, 뉴질랜드 등도 개별 발언을 통해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와 국제법 위반을 규탄하거나 유엔 안보리 결의 준수 등을 촉구했다.
이날 회의에서 북한이 의장국을 맡은 데 대해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해 이란, 나이지리아, 파키스탄 등이 축하하거나 지지, 협력 의지를 나타냈으나 의례적인 수준에 그쳤다.
한 대사는 이에 대해 “나뿐만 아니라 나의 조국을 겨냥한 비판”이라며 “침묵을 지킬 수 없다”며 발끈했다.
한 대사는 “신형 무기 시험 발사는 정기적인 활동으로, 국력 강화를 위한 우리의 계획에 따른 것”이라며 “어떤 나라도 국가정책을 비난하거나 개입할 권리는 없다. 평화는 오직 힘을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고 반박했다.
한국과 미국, 일본은 이날 본회의장에서도 굳건한 삼각 공조를 이어갔다.
한국은 ICBM을 포함한 북한의 잇따른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사실을 지적하며 유엔 안보리 결의 준수를 촉구했다.
일본도 북한에 모든 핵무기와 대량살상무기(WMD),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방식으로 폐기하라”고 적극 거들었다.
미국은 특히 외교적 해결을 거듭 강조하면서 북한에 대해 대화에 나서라고 다시 밝혔다.
네드 프라이스 국무부 대변인은 “북한과 같은 국가가 리더십 역할을 갖는다는 것은 확실히 유엔 기구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며 “북한은 핵 비확산 조약을 훼손하기 위해 전 세계 어느 정부보다 더 많은 활동을 펼쳐왔다”고 지적했다.
유엔을 감시하는 비정부기구 유엔워치의 힐렐 노이어는 북한이 군축회의 의장국을 맡은 것에 대해 “유엔의 이미지와 신뢰도를 심각하게 훼손할 것”이라며 회원국에 회의 보이콧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날 본회의는 이같은 냉랭한 분위기로 당초 3시간가량 예정됐던 회의시간이 1시간10분여 만에 종료됐다.
유엔 군축회의는 지난 1978년 제1차 유엔 군축 특별총회 결정에 따라 스위스 제네바에 설립됐으며, 65개 회원국이 참가하고 있는 세계 유일의 다자간 군축협상 기구다.
한국은 북한과 동시에 1996년에 가입했다.
군축회의 의장국은 공식 국명의 영어 알파벳 순으로 매년 6개 국가가 4주씩 맡고 있으며, 북한이 오는 24일까지 의장국을 맡은 것도 이에 따른 것이다.
올해 의장국은 중국, 콜롬비아, 쿠바, 북한, 콩고민주공화국, 에콰도르가 차례로 맡는다.
한편, 북한은 이에 앞서 2011년 순회 의장국을 맡았을 때도 국제사회에서 논란이 벌어졌었다.
‘핵전쟁 방지’ ‘핵군축’ ‘핵무기 경쟁 중단’ 등을 주로 다루는 군축회의에서 당시에도 ‘핵 불량국가’로 지목된 북한이 의장국을 맡는 게 적절한 지에 대한 국제사회의 심각한 문제 제기 차원이었다.
당시 캐나다는 항의의 뜻으로 북한이 의장국을 맡은 기간 군축회의 참여 보이콧을 선언했었다.
이번처럼 다수 회원국이 공동으로 북한의 의장국 수임을 비판하고 반발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북한은 이에 앞서 2001년 8월에 순회 의장국 차례가 돌아왔으나 인력 부족 등을 이유로 스스로 포기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