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신문=송국진 기자] 미국 정부가 미 조지아주(州)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에 대해 군대까지 동원한 무자비한 단속으로 300여명의 한국인을 구금함으로써 동맹국의 신뢰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한·미 관세 협상 타결로 한국 기업의 대규모 대미 투자가 예정된 상황에서 미 정부가 대표적인 대미 투자기업들을 겨냥해 대대적인 ‘불법체류자’ 검거에 나서면서 한·미관계가 시험대에 올랐다는 지적도 나온다.
당장 미국에 투자하고 있는 국내 기업들은 직원들을 범죄자 취급한 데 대한 우려와 반발 속에 긴급하게 미국 출장 자제령을 내리거나 법·절차 준수 지침을 내린 상태다.
미 국토안보수사국(HSI)은 4일(현지시간) 이민세관단속국(ICE), 군 등과 합동으로 조지아주에 있는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에서 이민단속을 실시해 475명을 체포했다.
이번 단속으로 연행·구금된 한국인은 300여명으로, 조지아주 폴크스턴에 있는 ICE 구금시설에 억류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티븐 슈랭크 HSI 특별수사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이번 작전은 조지아 주민과 미국인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우리의 의지를 반영한다”면서 “국토안보수사국 역사상 단일 장소에서 진행된 최대 규모의 단속 작전”이라고 밝혔다.
HSI는 이번 작전에 군대를 포함해 400여명의 단속 요원을 한꺼번에 투입했으며, 한국 기업 직원들에게 고용 기록, 급여 정보, 은행 계좌 정보, 근무 기록표, 이민 서류, 출생증명서 등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슈랭크 특별수사관은 “이번 작전은 이전처럼 요원들이 사람들을 버스에 잡아 태우는 식이 아니었으며, 지역 주민과 전직 직원으로부터 제보를 받아 수개월에 걸친 내사를 진행해 법원 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집행한 것”이라며 장기 내사를 거친 단속임을 강조했다
미 수사당국이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해외 기업을 상대로 이같이 대대적인 이민 단속을 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체포된 한국인들의 경우 정식 취업비자(H-1B)를 받지 않고 비이민 비자인 단기 방문 비자(B-1, B-2)나 무비자 전자여행허가(ESTA)로 미국에 입국해 법률상 금지된 노동행위를 한 혐의를 받는 것으로 전해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5일(현지시간) 브리핑에서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에서 한국인 직원들이 체포된 것과 관련해 “내 생각에는 그들은 불법체류자였고 이민세관단속국은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에 해외 기업을 유치해 제조업을 부흥시키겠다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를 강조하면서, 대대적인 단속으로 해외 투자 기업을 압박하는 것은 ‘목표 상충’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영국 BBC방송은 “이번 단속은 미국 내 제조업 강화와 불법 이민 단속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두 가지 핵심 정책 목표 사이에 잠재적인 긴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며 “핵심 동맹국과 관계에도 부담을 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미국은 한국과 관세 협상에서 관세율을 낮춰주는 대가로 3500억달러(약 486조원) 규모의 대미투자를 받기로 했고, 현대차와 LG 등 한국 대기업이 이를 주도하는 상황”이라면서 “이번 사태로 한국 정부와 기업 관계자들은 큰 우려를 하고 있으며 한·미 관계가 시험대에 올랐다”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한국 기업들은 최근 몇 년 동안 미국 공장에 수십억 달러를 쏟아부었고, 2023년 기준 미국 신규 프로젝트에 대한 최고의 외국인 투자자가 됐다”며 “한·미 관계 전문가들은 이번 공습이 신뢰를 훼손하고 분노를 부채질하는 등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고 전했다.
NYT는 태미 오버비 미국상공회의소 부회장을 인용해 “이번 공습이 미국 사업을 확대하고 있는 (한국·일본·대만 등) 아시아권 국가들에 또 다른 정책 리스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며 “미국에 투자하려는 아시아 지역 기업들에게 상당한 충격파가 됐다”고 말했다.
당장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출장 전면 중단과 함께 출장 중인 직원들에겐 조기 복귀 지침을 내렸고, 현대차도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미국 출장을 보류하라고 권고하는 등 대미 투자기업의 사업 차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재계에선 한미 조선협력 사업인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 현대제철의 미국 제철소 건설, HD현대일렉트릭과 효성중공업, LS일렉트릭 등 전력 기기 업체들의 현지공장 증설이 줄줄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 공장들의 건설과 조기 안정화를 위해선 본사 임직원과 협력사 직원 수백 명을 투입해야 하는데, 미국의 사증(비자) 발급 절차 개선 등 협력이 없이는 인력을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발급 요건이 까다로운 전문직 취업비자(H-1B)나 주재원 비자(L1·E2) 등을 받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회의 참석·계약 등을 위한 단기 방문 비자(B-1, B-2)도 발급률이 30% 정도에 그치는 데다 대기업 초청장과 계약서, 이력서 등을 첨부하고 면접까지 거치려면 실제 파견까지 통상 4~5개월이 걸린다.
그렇다면 전자여행허가(ESTA)를 통해 70~80일 일하고 귀국했다가 다시 미국에 입국해 일하는 관행이 불가피한데, 이렇게 하다가 다시 미 당국에 단속될 위험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보조금이 줄어든 데 이어 공사 지연으로 인해 추가 비용까지 발생하면 대규모 투자 자체가 원점에서 재검토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