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곤 전 금융감독원 국장
최윤곤 전 금융감독원 국장

우리에게 은행은 무엇인가?

목돈을 마련하기 위해 코 묻은 돈을 저축하고 필요할 때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사실상 금융의 전부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금융 세상도 변하고, 은행도 변하고 있다. 이제 더이상 우리가 알던 은행이 아니다. 여러 가지 물건을 파는 대형마트나 다름없다.

2019년 은행이 팔았던 파생결합펀드(Derivative­linked fund)에 투자한 안정적인 성향의 수많은 고객이 엄청난 손실을 보았다. 독일 국채를 기초로 한 파생결합증권에 투자하는 펀드로, 국채금리가 일정 수준 아래로 하락하면 원금 100%까지도 손해를 볼 수 있는 투자상품이다. 실제로 원금 전부를 날려버린 고객도 많았다.

한 은행 고객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개미처럼 일해서 소중한 돈이라 다른 곳에 투자하면 한 푼이라도 손해를 볼까 봐 정기예금처럼 안전하다고 하여 대한민국에서 제일 튼튼하다는 은행에 저축하는 개념으로 믿고 맡겼습니다”라며 은행을 성토하였다.

은행은 금융시스템의 가장 중추적인 기관이다. 고객으로부터 예·적금을 받아 대출을 하거나 알아서 관리한다. 고객이 맡긴 돈은 은행의 부채가 됨과 동시에 자산이 된다. 예금과 대출 기능을 수행하는 금융시스템의 핵심이다. 더욱이 고객이 돈을 주고받는 통로로써 지급결제 기능을 수행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작동하도록 예금 수취와 대출을 통해 신용창조(credit creation)가 이루어진다. 쉽게 말해, 빚을 통해 돈이 돌고 돌아 돈이 불어나고 경제가 돌아가는 것이다.

빚을 통한 신용창조 과정을 비판하는 전문가도 있지만, 자본주의는 빚을 통해 작동한다. 그야말로 마법이다. 모든 경제주체가 자기 돈만 가지고 예금만 하면 이는 ‘죽은 금융’이고 ‘죽은 경제’나 다름없다. 금융기관이 아니라 그냥 ‘금고’에 불과하다.

참고로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돈, 본원통화는 2023년 5월 말 현재 261.7조원이다. 예금과 대출을 통해 늘어난 통화는 광의통화(M2) 기준으로 3777.8조원이다. 돈이 불어나는 배수를 통화승수(money multiplier)라고 하는데, 계산하면 약 14.4배다.

고객의 예금을 맡아 관리하는 은행이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1997년 외환위기 때 경험했다. 물론 예금은 예금자보호제도를 통해 원리금 5000만원까지는 국가에서 보장한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가 회복하면서 은행의 자본이 확충되고 수익성이 호전되어 우리나라 은행의 건전성 지표는 매우 양호하다. 현실적으로 은행은 안전하고 은행예금도 안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은행에서 파는 금융상품이 안전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적금만 안전하다. 법적으로 원금보장이 되는지가 중요하다. 은행에서 파는 펀드나 다른 금융투자상품은 그 속성상 안전하지 않다. 이익을 볼 수도 있고 손실을 볼 수도 있다.

은행에서 팔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인식이나 주장은 우리 사회에서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은행이 잘못 설명하거나 미흡하게 설명하고 팔았다손 치더라도 금융투자상품은 기본적으로 고객의 책임이다. 상품 자체가 사기 상품이 아닌 이상 고객이 책임을 100% 면하기는 어렵다.

은행은 이제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형마트 같은 곳이다. 예·적금상품뿐만 아니라 펀드를 비롯하여 금융투자상품을 판다. 은행 안에 증권회사를 차린 거나 마찬가지다.

은행의 특정금전신탁(줄여서 ‘특금’이라고 함)을 통해서 증권투자도 할 수 있다. 고객(위탁자)이 운용을 지시하고 은행(수탁자)은 고객의 지시대로 자산을 관리하고 그 수익은 고객 또는 고객이 지정하는 자(수익자)에게 돌려주는 구조다.

1995년 동부그룹은 특금을 통해서 상장법인 한농 주식을 몰래 대량으로 매집한 후 경영권을 장악하여 증권시장을 발칵 뒤집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5% 대량보유 보고를 강화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지만, 한편으론 특금을 이용하여 주식투자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금도 특금을 통해 주식투자가 가능하다. 다만 일반적이지 않고 자사주 신탁 등 특수한 경우만 이용된다. 증권회사에 개설된 계좌에서 시세를 보면서 직접 주식을 거래하는 방식이 아니라, 은행에 주식을 매수하도록 지시하고 은행은 증권회사에 개설된 은행명의 계좌를 통해 주식을 사서 특금 계좌에 은행 명의로 보관·관리하는 방식이다.

2015년 전문가나 고액자산가들만이 애용하던 사모펀드의 규제가 완화되자 은행은 마트에서 물건 팔듯이 많은 고객에게 사모펀드를 팔았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선도국인 미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미국 금융중심지 월가 안내판.
미국 금융중심지 월가 안내판.

미국의 은행(상업은행)은 펀드 등 투자상품을 판매하지 못한다.

고객에게 판매하려면 자본시장 규제감독기관인 SEC(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에 브로커·딜러로 등록해야 한다. 쉽게 말해 증권회사가 된다는 의미다. 그러면 SEC의 규제감독과 검사를 받아야 한다.

은행의 건전성 감독과는 차원이 다른 투자자 보호 관점에서 증권회사로서 규제감독을 받는다. 은행이 증권회사로서 고객에게 증권을 팔고 사거나 중개하는 영업행위에 대해 감독을 받는다는 의미다. 이를 전문적으로 ‘기능별 규제(functional regulation)'라고 한다.

현실적으로 은행은 SEC에 브로커·딜러로 등록하지 않고, 증권업무도 하지 않는다. 1933년 은행법(Glass­Steagall Act) 제정을 통해 상업은행 업무와 투자은행 업무(증권업무)가 분리되었다. 1999년 금융서비스현대화법(Gramm­Leach­Bliley Act) 제정으로 Glass­Steagall Act는 사실상 폐기되고 은행에서 상업은행 업무와 투자은행 업무를 겸영할 수 있게 되었다.

규제가 완화되어 법적으로 은행이 SEC에 브로커·딜러로 등록하고 직접 증권업무를 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관행상 나아가 법적규제 부담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 증권업무는 예전처럼 금융지주회사 산하 증권회사(IB)에서 수행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은행이 직접 한다. 지주회사 산하에 증권회사가 있음에도 은행도 투자상품을 판매하는 증권업무(법적으로는 ‘금융투자업’, 구체적으로는 ‘집합투자증권 매매·중개업’)를 수행한다. 이를 규제 완화로 이해하고, 금융이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고객에게 엄청난 피해를 초래한 사고가 터졌다.

2015년 상품 속성상 리스크가 큰 사모펀드를 최소 투자금액 1억원이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도록 규제가 완화되었다. 일반투자자에 대한 엄격한 투자자 보호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채 사모펀드 시장이 활짝 열린 것이다.

은행은 규제완화를 틈타 전국적인 마케팅을 펼쳐 불법을 저지르면서까지 적극적으로 사모펀드를 판매하여 고객에게 큰 피해를 초래하였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신뢰하고 안정적이라고 인식된 은행이 저지른 불법적인 영업행태에서 비롯된 참사다.

물론 유사한 불법행위로 고객에게 손실을 초래한 증권회사도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일부는 사기상품을 납품한 사모펀드 운용회사도 주범의 하나다. 나아가 2015년 규제 완화로 사모펀드 시장의 장벽을 허문 정부 당국의 갑작스러운 정책 변경, 감독 당국의 선제적 감독 미흡도 냉정한 비판이 요구된다.

우리나라 사모펀드 사태는 일반고객을 대상으로 한 바람몰이식 영업행태의 끝판왕이나 다름없다. 미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미국은 기관투자가, 투자 전문가, 고액자산가, 업계 관계자 등을 대상으로 증권회사가 알음알음으로 사모펀드를 판매한다.

은행은 사모펀드 판매수익의 열 배 정도를 손해배상금으로 토해냈다. 은행을 위시한 금융산업에 대한 신뢰는 무너졌다. 규제와 감독은 다시 강화되고 복잡해졌다. 엄청난 수업료를 치렀다. 고객과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은행이라고 하면 최고의 금융기관이다. 예전에는 ‘제1금융권’이라고도 불렀고, 증권회사를 포함하여 나머지 금융기관은 ‘제2금융권’이라 불렀다. 은행은 일류고 그 외는 이류나 삼류라는 서열의식이 잠재의식에 깔려있다. 물론 기능과 역할이 다르고 중요도가 다르다.

지난 2019년 환매 중단 사태를 일으킨 디스커버리 펀드와 관련해 이 펀드를 판매한 IBK기업은행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촉구하며 시위를 하는 투자자들.
지난 2019년 환매 중단 사태를 일으킨 디스커버리 펀드와 관련해 이 펀드를 판매한 IBK기업은행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촉구하며 시위를 하는 투자자들.

주로 미국의 금융시장 뉴스를 전하는 부정확한 보도를 통해 이러한 인식이 더욱 왜곡되고 심화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최근에는 더욱더 뉴욕증시와 미국 중앙은행 Fed의 통화정책에 대한 뉴스가 시시각각 전해지고 있다. 금리동향과 전망, 증시동향과 전망, 환율, 인플레이션, 고용지표, 주택가격, 에너지 가격 등에 대한 보도가 쏟아진다.

이때 ‘은행’이 뉴욕 시장상황과 경제동향에 대해 코멘트하고 전망한다고 보도하는 사례가 많다. 예를 들어 “월가 대형은행 70%가 경기침체를 예상하고 있다”라고 보도한다.

마치 은행이 경기를 예측하고 증권시장을 전망한다고 오해하게 만든다. 하지만 경기와 증권시장 동향에 대해 코멘트하고 전망하는 곳은 주로 증권회사(IB), 자산운용사, 투자자문회사, 독립 리서치회사 등 금융투자업계다.

또 “이번 주 모건스탠리, 뱅크오브아메리카, 골드만삭스 등 주요 은행들의 분기 실적이 나온다”라고 보도한다. 미국은 ‘bank’라고 해도 미국민들은 혼란이나 오해가 없지만 우리나라는 ‘은행’이라고 하면 국민은행, 하나은행, 신한은행, 우리은행과 같은 은행을 생각한다.

미국의 대형 금융기관은 우리가 생각하는 은행이 아니라 금융그룹이다. 대부분이 금융지주회사다. 자회사로 은행(상업은행), 증권회사(투자은행), 자산운용회사 등 여러 금융기관을 거느리고 있다. 일반인에게 그냥 금융그룹 즉 금융지주회사 이름이 통용된다. 그 자체가 브랜드다. 당연히 지주회사만 상장되어 있다.

다만 상업은행 중심의 금융그룹인지, 투자은행(증권회사) 중심의 금융그룹인지, 양쪽 날개가 모두 활발한 금융그룹인지 정도의 차이가 있다.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는 유일하게 투자은행 중심의 금융그룹이다.

예를 들어 세계 최대의 금융그룹인 JP Morgan은 그룹 내에 은행, 증권회사, 자산운용회사가 별도로 있다. 월가 뉴스에 주로 나오는 전문가는 증권회사나 자산운용회사 소속의 전문가다. 경제와 시장을 예측하고 종목을 추천하는 곳은 증권회사다.

투자은행(investment bank)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미묘한 명칭이다. 일반인은 은행으로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투자은행은 증권회사를 일컫는 말이다. 미국은 예전부터 증권회사라는 말을 잘 쓰지 않고 투자은행(investment bank)이라고 불렀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증권회사를 bank라고 부르는 데 어색해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맥락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일반인은 미국 뉴스를 보면서 은행이 이것저것 다 하는 전천후 금융기관으로 오해하게 된다. 증권회사 목소리는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관행상 자회사를 따로따로 잘 일컫지 않는다. 금융그룹이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져 있어 금융그룹을 그냥 IB라고 부른다.

미국은 하원은 financial service committee, 상원은 banking committee에서 금융산업과 금융시장을 담당한다. 이때 상원의 banking committee를 ‘은행위원회’라고 하는 보도나 보고서가 많다.

이 또한 은행에 대한 편견을 심화시키는 요인이다. 1등만 기억하고 1등이 모든 것을 다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번역도 정확하지 않다. ‘금융위원회’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물론 우리나라 금융산업과 금융시장에 대한 정책과 규제감독을 총괄하는 정부기관인 ‘금융위원회’와 혼동할 수 있지만, ‘미국 상원 금융위원회에서’ 이렇게 말하면 오해가 없다. 그런데 ‘은행위원회’라고 하면 1등만 기억하게 하고 은행이 최고라는 편견을 조장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미국은 대표적인 자본시장 중심의 경제체제 국가다. 상업은행의 기능도 물론 중요하지만, 대체로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산업을 중심으로 역동적으로 돌아간다. 자본시장이 경제와 국민에게 그만큼 중요하다.

그래서 미국은 투자은행 나아가 금융투자산업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목돈 마련이든 퇴직연금을 위해서든 금융자산의 절반 이상이 자본시장에 투자되고 있다. 미국 국민은 매일매일 금융투자산업 전문가의 코메트와 전망을 듣고 투자하며 살아간다. (2편에서 계속됨)

<최윤곤 전 금감원 국장 약력>

- 금융감독원 33년 근무 
- 자본시장조사국장, 기업공시제도실장, 광주전남지원장, 금융교육 교수 등 역임
- 중앙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 University of Texas(Austin) MBA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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