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5)
‘온유’는 ‘겸손’입니다. ‘겸손’이란 헬라어로 ‘타페이노프로쉬네’(ταπεινοφροσύνη)로 ‘낮은’이라는 뜻인 ‘타페이노스’(ταπεινὸς)와 ‘마음’이라는 뜻인 ‘프랜’(φρήν)이 합성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마음을 낮은 데 둔다’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빌립보서 2:3)는 마음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암센터 MD앤더슨에서 32년 동안 재직해온 김의신 박사의 말이 생각이 납니다. 그는 미국의 의사들이 뽑은 ‘미국의 의사’에 11차례나 선정될 정도로 대단한 분입니다. 어느 날 한 기자가 ‘가장 고치기 힘든 암 환자는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그에게 묻자, 그는 ‘의사, 교수, 변호사 그리고 검사’ 같은 사람들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이거 왜 이래. 나 그렇게 취급당할 사람이 아니야. 알고 보면 너보다 나으면 낫지 못하지 않을걸’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을 우리는 ‘교만(驕慢)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교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겉으로 공손한 태도를 보인다고 자신이 겸손한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이는 나폴레옹의 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전쟁 때마다 승리했고, 황제가 된 뒤에는 ‘내 사전에는 불가능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다 영국을 굴복시키려고 영국과 모든 교역을 금지하는 대륙봉쇄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러시아가 이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에 나폴레옹은 1812년 64만명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공격했습니다. 이에 러시아는 프랑스군의 절반도 되지 않는 23만명으로 ‘청야전술’을 펼치며 맞섰습니다. 러시아군은 후퇴하면서 식량과 도시를 불태우며 러시아 안쪽 깊숙한 곳으로 나폴레옹 군대를 유인했습니다.
러시아군은 예년보다 이른 한파가 찾아올 것을 알고 이런 전략과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대로 한파를 대비하지 못한 나폴레옹 군대는 추위에 떨어야 했습니다. 본국에서 너무 멀리 온 탓에 보급이 늦어져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 군대는 퇴각해야 했고, 그 많던 병사들은 전쟁하다 죽고 실종되고 추위와 굶주림에 살아 돌아온 병사는 64만명 중 고작 2만5000명 정도였습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은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후 그는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며 요한계시록 2장 7절 말씀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왜입니까? 전문가들은 철새가 다른 해보다 빨리 이동하는 것과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 나폴레옹에게 그해 날씨가 예년에 비해 훨씬 더 추울 것이므로 러시아 원정을 늦추어야 한다고 조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깔보았고 날씨와 상황도 무시했으며, 다른 이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교만한 사람은 ‘들을 귀가 닫혀 있는 영적인 농아이며,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으며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세베르’(שֶׁבֶר)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그러나 ‘온유’인 ‘관용’과 ‘절제’와 ‘공의’와 ‘겸손’의 성령의 열매를 맺는 “온유한 자는” 오늘 머리글 말씀에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마태복음 5:5)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의문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수기 12:3)처럼 모세를 ‘온유’의 대명사로 이야기했는데, ‘성격’이 ‘온유함’을 결정하는 것이 맞느냐? 하는 것이고, 온유한 사람의 특징인 땅, 가나안 땅을 받았다 하는데 맞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대단히 온유한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욱하는 성격을 못 죽이고 애굽 군사를 때려 죽게 했으며, 하나님 앞에서 ‘반석’(盤石)을 두들겨 패기도 했고, 첫 번째 십계명 돌 판을 받아서 시내 산으로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잔치를 벌이자, 그 첫 번째 십계명 돌판을 집어던져서 박살을 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도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자들의 좌판을 엎어버렸고, 바리새인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며 독사의 자식이라고도 했습니다.
모세와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온유’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온유’는 하나님 말씀이면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고, 어떤 죄인도 모두 받아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성취하기 위해 끝까지 순종함으로 인간을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온유’는 단순히 ‘도덕적인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은 ‘온유’한 모세가 광야에서 죽음으로 이스라엘 사람이 가나안 땅을 차지한 것처럼, ‘온유’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 천국을 차지하게 된 것이라 했습니다.
천국의 땅을 상속받는 ‘온유’도 야고보서 1장 21절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말씀처럼,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이는 마음이라 하셨습니다. 성령의 열매로 주시는 ‘온유한 성품’을 우리가 가질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변요한 목사 약력>
- 경찰청교회 시무
- 극동방송 운영위원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경찰자문위원
- 서울대학교 동창회 이사
